언제부턴가 드라마가 끝나는 시점과 맞물려 대본집이 나오곤 하는데, 특이하게도 김은숙 작가의 경우 대본북이 아니라 소설로 출간하고 있다. 본방사수해온 드라마의 대본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재미는 빼앗겨 버렸으나 반대로 영상을 소설의 형식으로 다시 보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결과적으로 멋진 선택이었다.
사실 <<미스터션샤인>>은 기대했던 차기작이 아니었다. <<태양의후예>>,<<도깨비>>에 머물러 있던 감성을 채우기엔 시대도, 배경도, 역사도 암울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냥 건너뛸까?' 했던 작품이었는데, 대사의 감칠맛에 홀려 종종 눈물을 닦아가며 끝까지 시청하고야 말았다. 그 암울하던 시기에도 낭만은 있었고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없음에도 서로를 향한 안타까움은 스며들어 안타까움을 더한 시기였다. 게다가 한 여인을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세 남자가 함께 모이는 장면에서의 브로맨스란.......유머스러움을 잊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서 잠시 역사적 배경을 잊은 채 웃고 말았다.
돌아온 이방인 유진 초이
너무 똑똑해서 노비로서의 삶이 위태로웠던 아홉살 유진은 하루 아침에 부모를 잃고 추노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도공 은산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군의 신분으로 다시 조선땅을 밟게 된다. 친일한 반역자인 로건을 저격하는 날 마주친 남장여인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면서 자꾸만 엮이게 되고, 주변인들과도 엮이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의병들을 돕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이 한 여인을 살리는 일이었기에.....
고매한 애기씨 애신
작금의 조선땅에서 누구도 모를 리 없는 고매한 여인. 얼굴도 모르는 아비와 어미가 일본땅에서 의병으로 죽었으나 왕의 스승이었던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 부족함 없이 자랐다. 하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 그녀에게 있었으니.....정혼자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만큼 나이가 찬 애신이 몰래 손에 든 건 총이었다. 군자금을 대는 할아버지와 비밀리에 의병활동을 하고 있는 애신. 너도나도 나라를 팔아먹을 때 반대로 몰락해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보태고 있던 애신 앞에 그가 나타났다. '러브'를 함께 하자는 말에 움찔한 남자, 유진이....
능글능글함에 슬픔을 감춘자 희성
입 한 번 잘못놀렸다가 바로 매맞거나, 칼맞거나, 총맞기좋은 조선에서 나불나불 유쾌하게 제 할말을 다 하고 사는 남자 희성의 능글맞음은 웃음포인트였다. 모를 때 한 말이나, 알고나서 한 말이나....... 그가 입만 열만 무거웠던 분위기는 풍선처럼 가볍게 띄워졌다.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 그는 그렇게 능글능글함 속에 제 속을 감추고 사는 남자다. 착복해서 만든 재산으로 개인의 영달만을 쫓아온 조부도 부끄러웠고 비슷한 삶을 걸어온 부모 역시 그에게는 수치스러움을 더했으나 그는 반항 대신 인생을 낭비하는 것으로 복수 꿈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살면서 집안이 정한 혼사도 팽개쳐두었으나 애신을 먼저 만나지 못한 건 두고두고 한으로 남을 일이었다.
거친남자의 소금같은 순정, 동매
아내를 범한 자를 두고도 칼즐 동물에게만 휘둘러야했던 아비는 백정이었고 돌맞아 죽은 어미는 백정의 처였다. 그 삶을 그대로 물려받아야했던 동매의 목숨을 구한 건 어린날의 애기씨였고 비록 내밀어진 손에 큰 상처를 주고 말았으나 그 한 순간의 추억을 붙들고 살고 있는 남자가 동매다. 무신회 한성지부장으로 낭인들을 몰고다니는 그 역시 돌아온 이방인이었으나 소중한 애기씨를 지키는 방법은 설탕같은 유진과 대비되는 소금같은 남자다.
화려하고 노련한 여인, 히나
'호텔 글로리'의 사장인 히나는 노련한 여인이었다. 빈관을 꾸려가는 경영인으로도, 사람이나 사건에 대처하는 능력도 탁월했지만 화려함만 엿보였던 그녀 역시 과거가 남다른 여인. 나라를 팔아치우고 아내를 갈아치운 아비가 종국엔 어린 딸을 팔아치웠고 남편의 학대를 견디던 히나는 스스로를 구명하면서 현재의 '쿠도 히나'로 꼿꼿하게 일어섰다. 아비의 존재와 남편의 죽음. 발목 잡힐 때마다 그녀는 살아남았다.
'당분간 조선인입니다','당분간 미국인입니다'..라는 드라마 속 찰진 대사가 소설 속에도 고스란히 남아 드라마 다시보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읽게 만든 소설 <<미스터션샤인>>은 울림이 오래가는 작품이다. 서가에 꽂아두고 일년에 한 두번씩 꺼내 읽기 적당한 책으로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시대를 살았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주는 소설이다. 막연히 '조상' 혹은 '옛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해왔던 사람들이 살다간 날들의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